"제발 주일만 빼고 배 아파라. 응?“
사람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인 줄은 알지만, 출산 예정일이 하루 이틀 다가오면서 집사람에게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다.
1999년10월25일 월요일은 민희의 예정일이다.
교회는 서울이고 집과 병원은 인천이었기 때문에 10월24일 주일에는 나만 서울로 올라오고, 집사람은 처갓집으로 가서 부모님과 함께 교회에 갔다.
3부 예배를 마치고 얼마나 되었을까?
전화가 왔다.
“2시쯤 예배를 마치고 나오다가 양수가 터졌어요. 지금은 병원 이예요”
‘양수가 터지면 금방 아기가 나오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에 빨리 병원으로 달려가서 옆에 있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 날은 내가 담당하고 있는 20~24살까지의 청년들이 헌신예배를 드리는 날이라 설교도 해야 하고, 도저히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잠시 다녀올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대중교통으로 다녀오려면 2~3시간정도는 걸려야 하기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마음속으로만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이종권 장로님이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으셨다.
그리고는 ‘자기 차로 가면 1시간 안팎으로 다녀올 수 있다’고 하시면서 손수 운전을 해 주셨다.
서울로 돌아와서 저녁예배를 마치고, 다시 병원에 갔을 때에도 민희는 엄마 뱃속에만 있으려고 하고 있었다.
집사람과 함께 긴 진통의 시간이 흘렀다.
개인병원 분만실인지라 꼭 필요한 경우에만 잠시 가족이 들어오게 하고, 복도나 대기실에서 기다려야 했는데, 집사람이 너무 힘들어하는 상황에서 내가 성직자라는 것을 알고는 분만실에 있어도 좋다는 허락을 해 주었다.
집사람은 내가 옆에서 손을 잡아 주는 것만으로도 힘을 얻고 안정을 되찾았다.
수시로 내진을 하고, 아기의 머리가 보이기 시작하면 본격적인 출산을 위해 옆방으로 옮겨가기까지의 분만실 안의 모습은 가족들이나 특히 남자들이 있으면 불편하고 신경이 쓰일 만도 했다.
월요일 낮이 돼서도 계속 진통을 하고 있는데, 같은 교회에서 자란 친구 중에 ‘내가 꼭 자기 큰오빠 같다’고 해서 학창시절 내내 나를 ‘오빠’라고 부르고, 나도 ‘막내’라고 부르던 상례가 가족들과 남편을 뒤로 한 채 불안한 마음으로 분만실에 들어왔다.
“상례야!”
“어~ 주형아!”
상례는 낯익은 얼굴에 반색을 하며 내 손을 꽉 쥐고 진통을 했다.
조금 전까지는 공민정 산모의 보호자가 분명했는데, 갑자기 옆 침대 산모의 보호자까지 되어버린 나를 보면서 간호사들이 어리둥절해 하였다.
상례는 1시간 동안 진통을 한 후에 예쁜 딸을 낳았다.
집사람은 계속 되는 진통에도 자연분만이 여의치 않아 수술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양수가 터지고 진통을 한지 26시간 5분만인 10월25일 오후 4시5분이 되어서야 민희의 첫 울음소리를 들었다.
10월27일 수요일 아침.
‘이제 그만 일어나서 걷기도 하고 운동을 하라’고 하면서 간호사가 집사람의 손을 잡고 번쩍 일으켜 세웠다.
간호사는 ‘아직도 일어나지 못하겠다’며 힘들어하는 집사람이 엄살을 피우는 줄 안 것 같다. 그러나, 강제로 일으켜 세운 집사람이 정신을 잃었다.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고, 숨을 쉬지 않는다.
입술이 파랗게 질리기 시작했고, 혈압이 급상승했다.
급하게 외과로 옮겨진 아내의 헤모글로빈 수치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뚝뚝 떨어졌다.
고열이 났다.
혹시 수술한 부위에 출혈이 있는지 검사해 보았지만 정상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이런 증상들에 대해서 ‘이해할 수가 없다’고 했다.
집사람은 응급조치 후에 겨우 정신을 차렸지만 고열은 내릴 줄을 몰랐다.
10월 말(末)의 바람이 차가웠지만 집사람이 있는 502호 병실만은 보일러를 잠그고, 창문을 모두 열었다.
‘부모님들은 산모가 따뜻하게 몸조리를 해야 한다’고 야단이셨지만, 계속되는 고열에 어쩔 수 없이 얼음 팩으로 온 몸을 채우기까지 했다.
다음 날도 집사람은 정신을 잃었고, 전날과 똑같은 증상이 일어났다.
의사 선생님은 전날보다 헤모글로빈 수치가 더 위험 수치까지 떨어졌기 때문에 당장 수혈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수혈로 인해 생길 수 있는 부정적인 경우들을 하나하나 설명하고서 동의서에 싸인을 하라고 하였다.
하나같이 무서운 말들뿐이었다.
‘있을 수 있는 일들’이라고 설명을 하지만, 나에게는 ‘꼭 그렇게 된다’는 말들로 들렸다.
병원에서는 망설이고 있는 나에게 ‘급하다’고 재촉을 하였고, 나는 결국 싸인을 했다.
늦은 밤이었지만 집사람을 위한 혈액이 응급으로 보내져 왔다.
이 날도 고열은 식을 줄 몰랐고, 집사람은 계속 차가운 방에서 얼음을 온 몸에 두른 채 있어야 했다.
그리고, 다음날도 집사람은 또 정신을 잃었다.
이번에는 의료진들의 모습이 더 다급해 보였다.
급하게 수액을 팔에 꽂았다.
의사 선생님이 더 빨리 들어가게 하라고 야단이다.
링거액 조절장치를 완전히 개방하였다.
집사람의 온 몸에 의료장비와 연결된 집게 같은 것들이 물려지고, 붙여지고, 산소호흡기가 끼워지고, 혈압을 재고, 체온을 재고, 피를 뽑고, 하는 와중에도 의사 선생님은 수액을 더 빨리 넣으라고 야단이다.
간호사는 천장까지 링거를 매달았다가 결국 천장의 석고보드를 빼어 내고 그 속에 더 높이 매달았다.
순식간에 두 개, 세 개, …, 여러 개의 수액이 집사람에게 부어졌다.
그 날 밤에는 외과 원장님과 산부인과 원장님 모두 퇴근을 못했다.
별도의 집중 관찰실이 없었던 터라, 집사람은 x-ray 촬영대 위에 눕혀졌고, 밤새도록 간호사들이 별도로 배치돼서 15분 간격으로 모든 수치들을 다시 체크하고, 곧바로 원장 선생님께 보고하였다.
1주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른다.
온 식구들이 집사람을 위해서 집중적으로 기도했다.
퇴원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토요일이 되면서 집사람의 상태가 갑자기 정상적으로 회복되었다.
의사 선생님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고, 뭐라고 설명을 할 수도 없지만 집사람의 몸에 잠재되어 있던 어떤 것이 수술로 인해 촉발되어 위험한 지경에까지 이른 것이 아닌가 싶다’고 말하면서 후에 종합검진을 정밀하게 받아 보라고 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퇴원이 허락되었다.
집사람은 10월31일 주일 2시에 민희와 함께 퇴원을 했다.
나는 지금도 분만실에서 온통 땀에 젖으면서 애쓰던 집사람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자기보다 늦게 분만실에 들어 온 산모들이 빨리 아기를 낳는 모습에 절망하던 모습도 잊을 수가 없고, 정말 힘들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마다 신랑을 찾으며 힘을 얻고 안정을 되찾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아 긴장할 때, 신랑의 목소리를 듣고는 애써 눈을 뜨던 모습도 잊을 수가 없고, 하루에 한번씩 의식을 잃고 숨을 멈춘 채 창백한 얼굴로 입술이 파래지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아기는 건강해서 다행이라며 민희를 보고 좋아하던 집사람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나는 지금까지도 집사람의 생사를 넘나들던 이런 모습들 중에 어느 하나도 내가 대신 해 줄 수 없었던 것이 너무 미안하고, 가슴 절이다.
엄마들에 비해 아빠는 너무 쉽게 되는 것 같다.
나는 평소에 삼 형제를 낳고 싶었다.
하지만 집사람을 위해서는 아이 욕심을 버리고, 민희 하나만 잘 키워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결심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이렇게 힘들었던 1주일 동안, 서울에서부터 달려와 축하해 주고 위로해 준 많은 성도들의 사랑에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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