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찌꼬마

아찌와 꼬마의 일상

토끼를 위하여

3. 타임머신 / 아빠에게는 좋은 친구들이 있단다. -꿈같은 30개월

제주형 2016. 3. 27. 14:50

"기독교인들은 군에서의 첫날을 하나님께 드려라"
306보충대에 입소한 첫날 저녁에 받은 명령이었다.
나는 입대하기 전에 어머니와 동일한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했다.
1. 믿음의 부대를 만나게 해 주세요.
2. 믿음의 상관을 만나게 해 주세요.
3. 믿음의 동역자를 만나게 해 주세요.
4. 군에서도 주의 일을 하게 해 주세요
이 기도들이 입대한 첫날부터 응답되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306보충대 대대장님은 집사님이셨는데, 그 분의 명령으로 나를 비롯한 믿음의 형제들은 군에서 맞은 첫 날 밤을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맞았다.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그리고, 배정 받은 곳이 7296사단 신병훈련소.
이곳에서 나는 모든 훈련병들에게 ‘할 수 있다 하신 이는’이라는 찬양을 가르쳤다.
당시 우리 사단의 사단가인 비룡가와 함께 제2의 사단가로 불려진 찬양이다.
당시 사단장님도 모든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는 집사님이셨다.
물론 나에게도 모든 예배에 참여할 수 있는 시간들이 보장되어졌다.
‘더 열심히 해야해!’
‘다른 사람들보다 뒤쳐지면 안 돼’
‘하나님 제게 힘을 더해 주세요’
나는 6주간의 훈련기간 동안 받은 내무생활 평가와 훈련을 마치면서 이루어진 종합평가에서 최우수교육상을 받았고, 부상으로 7일간의 포상휴가를 받았다.
다른 사람들은 훈련소에서 면회를 마치고 곧바로 각자 배치 받은 부대로 실려갈 때, 나는 아버지의 차를 타고 휴가를 왔다.
휴가를 마치고 보충대에서 대기하던 중에 지프차 한 대가 나를 데리러 왔다.
그렇게 실려간 곳이 3189부대.
이곳에서 나는 군종병이면서, 무선통신병이었다.
군생활을 하는 동안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한 명도 없던 크리스챤 간부들이 신우회가 작정하고 기도하는 동안 새로 오는 간부들마다 크리스챤으로 바뀌어졌던 일...
하나님의 은혜로 30평 남짓한 교회를 짓고 화단을 꾸미던 일...
항상 제일 많은 편지와 성탄절 카드를 받아서 부러움을 샀던 일...
빨간 글씨의 휴일마다 누구라도 예고 없이 면회를 와 주었던 일...
새벽에 훈련용 비상이 걸려서 가상의 상황을 전파해야 하는데, 연병장까지 스피커를 다 켜고 큰 소리로 방송을 해서 마을 사람들이 정말로 전쟁이 난 줄 알았던 일...
사단장님이 부대 순시를 왔는데 상황실에서 졸다가 오후 4시를 5시로 잘못보고 애국가를 울렸던 일...
이 때 사단장님은 “이 부대는 4시에 일과 종료하나?”라는 한마디를 남기셨고, 나는 말 그대로 영창에 갈 뻔했다.
정문 위병근무 지원을 나갔다가 동기 녀석이 사단장님 승용차에 정지신호를 보내면서 바리케이트를 올렸던 일...
다행히 사복을 입은 부관만 타고 있었는데, 나는 당황한 동기 대신에 오히려 정지 신호 무시에 대해 항의하며 끝까지 자존심을 세웠다.
그리고, 얼마 뒤에 사단장실로 착출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대장님의 배려로 다른 사람을 대치하고 가지 않았다.
휴가병력을 잡아놓고 부대에 전화해서 반말로 큰소리치는 헌병들에게 같은 사병인데 너무 건방지다고 큰소리 치던 일...
수색대와 훈련 중에 큰 사고가 났는데, 사고 현장에서 수색중대장님에게 엄중히 항의하며 충고하던 일...
이 때 수색중대장님은 역시 엘리트 장교답게 사병이었던 나의 말을 받아 들여서 우리 대장님과 전 병력 앞에 공개 사과를 하였고, 사건이 잘 마무리되었다.
성탄절 새벽송을 돌 때, 주임상사 집에 모여서 고스톱을 치던 간부들이 판돈을 다 걷어서 헌금하던 일...
훈련중에 집중호우를 만나 차량들이 낭떠러지로 쓸려 내려갈 때 울부짖는 운전병들 옆에 매달려서 기도해 주던 일...
기무대로 착출 지시를 받았던 일...
그리고, 1호 차의 선탑자 자리에 타고 가다가 연병장에 사열 중이던 72연대 1대대 전체의 경례를 받았던 일...
이 일은 정말로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정문에서 1호 차가 들어온다는 연락을 받은 1대대장은, 72연대 연대장님이 들어오는 줄 안 것이다.
“전체 차렷. 연대장님께 대하여 경례.”
“단...! 결...! 연대장님 파이팅! 파이팅! 파이팅!”
이쯤 되면 대형사고가 아닐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되돌아 올 때 1대대 작전관이 길 한 가운데 서서 내가 탄 차를 막아섰다.
“너 차에서 내려”
“왜 그러십니까?”
“너는 뭔데 사병이 1호 차를 선탑하나?”
“우리 대장님이 선탑하라고 하셨습니다.”
“규정 위반이야. 네가 1대대 전체 경례를 받았잖아”
“정문에서는 자기 직속 상관 차도 구분 못한답니까?”
“우리 부대는 지프차가 40대가 넘습니다. 규정대로 간부만 선탑하면 우리부대는 차 한 대도 못 움직입니다.”
“작전관님이 우리 부대에 대해서 뭘 아십니까?”
“가자”
운전병은 쏜살같이 차를 몰아서 1대대 정문을 통과했고, 나는 이것으로 상황이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얼마 뒤에 대장님이 바뀌게 되면서 바로 그 1대대 작전관이 승진하여 우리 부대 대장님으로 오게 되었다.
“자네. 나 기억하지?”
“… … ^^;;”
제대를 몇 달 남겨 두고 나는 군생활이 꼬일 뻔했다.
그리고, 제대하던 날.
몇 달 전에 사단 사령부로 자리를 옮기신 전임 김광일 대장님과 사모님이 제대를 축하한다며 집에서 손수 맛있는 식사를 준비해 주시고, 인천으로 한번에 갈 수 있는 곳이라며 의정부역까지 데려다주셨다.
이날 대장님은 "우리 제주형이 간다. 우리 제주형이 간다"를 연거푸 말씀하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다.
그리고, 지금도 간혹 서울에 오시면 '보고 싶어서 왔노라'고 일부로 연희동을 들러 주신다.
어느 것 하나 버릴 수 없는, 꿈같은 30개월을 통해 얻은 소중한 추억들이다.
그러나, 수없이 많은 기억과 추억들 속에서도 무엇보다 군생활을 하는 동안 특별히 나에게 남은 가장 따뜻한 추억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들이다.
‘꿈에 군복을 입은 주형이가 대문 앞에 서서 “엄마~”라고 부르면 그 날 꼭 휴가를 나오더라’며 늘 한결같이 아들이 부르는 꿈을 기대하시던 어머니...
‘아들아!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거니? 많이 힘들지!...’라고 편지를 하셔서는 ‘성령께서 특별히 기도를 시키시던 시간에 아들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셨다’는 어머니...
사실 그 시간에 나는 훈련 중대 중선(중대선임)으로서 소선(소대선임)들과 함께 중대원들 전체를 대표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압을 받았다. 그리고, 결국 탈진해서 의무대로 옮겨져 링거를 맞았다.
너무나 힘들고 지친 몸과 마음이 어머니의 편지를 읽으면서 흐르던 눈물과 함께 녹아졌고, 훈련 중에 영양제까지 맞을 수 있었던 것이 오히려 감사했다.
역시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이런 어머니의 사랑과 함께 나에게는 말로 다 할 수 없이 많은 추억들이 30개월 동안의 군생활 속에 남아 있다.
입대하던 날, 차안에서 아들의 손을 꼭 잡으신 채 고개는 차창 쪽으로 돌리시고 소리 없이 흘리시던 어머니의 눈물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아들의 마음이 약해질까’ 걱정하시면서 이내 눈물을 감추시던 나의 어머니.
30개월을 하루같이 여기시고 밤낮으로 기도하시던 나의 어머니.
지금도 어머니는 나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
언제나 특별한 사랑과 기도로, 나의 모든 날들을 꿈같은 시간으로 바꾸어 주시는 어머니...
나는 어머니를 사랑한다.
어머니!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