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밤부터 눈이 오더니 아침까지 계속 오고 있다.
눈을 맞으며 기분 좋게 학교에 갔다.
교실에 들어서는데 갑자기 환호성이 들렸다.
“우~우!” “오~오!”, “어~어!” “이~야!”, “야~아!~ 대단한데!” ‘휘이익~’
어찌된 일인지 아이들이 전부 교실 창문에 매달려서 휘파람까지 불면서 야단이 아니다.
“주형아! 이리 좀 와 봐. 빨리”
창문 앞에 가서 친구들이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친구들이 가리키는 곳은 우리 학교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신흥여중 운동장이었다.
운동장 한 가운데에는 ‘3-5 제주형’이라는 글씨가 하트모양 안에 크게 쓰여 있었다.
아직까지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운동장 한 가운데에 가득하게, 누군가가 빗자루로 예쁘게 폭이 20㎝는 충분히 되어 보이는 글씨를 써 놓은 것이다.
“치~ 누구야 남사스럽게!”
애써 태연한 척 했지만 기분이 좋았다.
나는 신흥중학교 1회 졸업생이다.
신흥여중과 우리 학교는 같은 해에 지어져서 함께 입학생을 받았고,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정문이 붙어 있을 뿐만 아니라, 버스정류장에서부터 학교까지 400m가 넘는 진입로를 함께 걸어 들어가야 한다.
더군다나 나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선도부를 데리고, 등하교 지도를 위해 이 진입로에 서 있었다.
그리고, 1학년 때는 한 학년씩밖에 없었기 때문에 두 학교가 함께 하는 행사들도 많았다.
한번은 귀순용사를 초청하여 실시된 방공강연회가 있었는데, 이 때도 두 학교가 우리 학교 운동장에 모였고, 내가 제일 앞에 서서 구령을 하였다.
“열중~ 쉬엇!”
“차렷!”
“강사님께 대하여~ 경례!”
나의 구령에 맞추어서 남, 여 학생들이 거수경례를 했다.
“성실!”
우리 학교의 경례 구호는 “성실!”이었다.
나도 강단을 향해 뒤돌아서 씩씩하게 경례를 했다.
“성. 실.!”
이날의 강사는 정중히 목례를 하고서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편히 쉬어”
나는 다시 학생들에게 구령하기 위해 돌아서면서 순간 당황했다.
교장선생님은 인사를 받으시고는 항상 “쉬어”라고 말씀하시는데, 오늘의 강사는 “편히 쉬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구령을 해야하지?’
‘맞아! 예령(豫令)은 길게... 동령(動令)은 짧게...’
나는 평소 대대장으로 교육받을 때의 원칙을 떠올리고, 두 학교 전교생을 향해 힘차게 구령했다.
“편히~~~ 쉬엇!”
순식간에 학교 운동장은 웃음바다가 되었고, 강단 위의 선생님들과 운동장의 아이들은 모두 배를 움켜잡고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얼굴이 빨갛게 되어 버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편히 쉬어”라는 구령은 “열중~ 쉬어!” “쉬어!”라고 한 후에, “편히 쉬어”라고 구령하면 되었다.
자연히 나의 얼굴과 이름은 신흥여중까지 알려졌고, 덕분에 늘 인기투표 순위 1․2위를 달렸다.
어떤 때는 버스에서 “나랑 제주형이는 엄청 친한데..., 주형이는 김치찌개를 좋아하고, 긴 머리를 좋아하고, 매너도 좋고, 숭의교회 회장이고...,…”라며, 나를 정말로 잘 아는 것같이 자기 친구들에게 침을 튀기면서 이야기하는 여학생도 있었다.
나는 모르는 아이라서 혹시나 하고 고개를 디밀었는데, 역시 그 아이는 나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나와 함께 있던 짓궂은 친구들이 “얘가 제주형인데요...!...?”라고 하는 바람에 그 여학생은 얼굴이 빨개졌다.
나는 학생회 출석인원이 2000명이 넘었던 교회에서 회장을 오래도록 한 덕분에 남․여 학교 어디나 아는 친구들과 선․후배들이 있었고, 인천에 있는 모든 중․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중등부 때는 한소리축제, 고등부 때는 숭란축제를 열면서 양복을 입고 회장인사를 했기 때문에 인천 전체 여학교에서도 늘 인기투표 순위 안에 들을 수 있었던 행운아였다..
당연히 여학생들과 관련된 재미있는 에피소드들도 많았다.
한번은 한 여학생이 ‘자기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다’고 스스로 이상하고 야한 소문을 내서 그 학생이 다니는 학교 학생주임 선생님에게 불려가기도 했다.
그리고, “혹시, 너! **학교 김XX 알아? 그 애가 너랑 엄청 친하다던데...?”라는 이야기들을 같은 교회 친구들에게 자주 들었다.
“같은 학교에 다니는 친한 친구가 너랑 소개시켜주지 않으면 절교한데... 제발 한번만 만나 주라 응?”, 이런 부탁도 자주 받았다.
무작정 교회로 찾아오는 여학생들도 있었고, “같이 여행을 가자”고 청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생일초대를 받아서 가보니 초대받은 사람이 달랑 나 혼자였던 적도 있었고, ‘자기가 좋아하는 여학생이 나를 좋아한다’고 결투를 신청하는 무서운 아이들도 있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 친구들은 ‘제․태풍’(우리가 아무리 바람을 일으켜도 비교가 안 되는 경지의 이성관계에 마당발)이나 ‘3분’(인천의 어느 곳을 가도 여자 친구들을 만나고, 3분이 채 되기도 전에 또 다른 여자친구들을 계속 만나는 부러움의 대상)이라는 별명으로 나를 부르기도 했다.
사실 여학생뿐만 아니고 많은 선․후배와 친구들을 만났는데도 한참 사춘기 시절을 지나던 친구들의 관심사가 반영된 별명이었다.
나는 이런 추억들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가지게 된 사회성을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우리 아버지는 나에게 ‘다방면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분’으로 어려서부터 기억되어졌다.
나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많은 만남의 복을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사랑하는 딸 민희에게도 언제나 좋은 추억과, 좋은 만남들로 준비해 놓고 계신 것을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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